곰고미를 만나다.

녀석을 처음 만난 건 유난히 찬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날 날씨보다 더 차가운 지하철 4호선의 한 플랫폼에서였다. 사람들이 지나가 버린 플랫폼 한 구석에서 이렇게 웅크리고 있던 그 녀석을 처음 만났다.

지하철 플랫폼에서 자고 있던 곰고미


처음 녀석을 봤을 때 살아있는 그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난 녀석이 평범한 인형이라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. 녀석을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초록색 니트점퍼에 자기 키보다 2배나 긴 목도리를 감고 홈리스처럼 누워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보지 않았다면 녀석은 분명 지금쯤 지하철공사 쓰레기 봉투에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.

쓰레기통에 버려질 뻔 한 곰고미


녀석은 무슨 생각 중인지 말이 없었지만, 난 추위에 떨고 있는 그 녀석을 거기 그렇게 버려두고 올 수가 없었다.

함께갈래?

 ...

녀석은 별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나와 함께 지하철 4호선에 올랐다.

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도, 지하철역에서 우리집 아파트 입구까지 오면서도 녀석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.

나의 퇴근길에 동행하게 된 곰고미


난 곰고미야.

그녀석의 입에서 처음 들은 한 마디이다.

집에 도착하자마자 예민한 봉순씨는 난리다.

녀석의 지저분한 옷차림과 퀴퀴한 냄새 때문에 목욕탕으로 바로 들어가라고 야단을 쳤다.

집에 오자마자 목욕탕에 끌려온 곰고미


목욕탕에 들어온 녀석은 간만에 물을 본 듯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2분 17초 동안이나 마신 후에야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.

시원한 샤워기 앞에 서 있는 곰고미


녀석은 그렇게 거품 욕조에 몸을 뉘인 채 잠이 들어 버렸다.

거품 목욕중인 곰고미


녀석은 당분간 우리집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.

녀석도 처음엔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한 사람이 있었을텐데...
이제는 그 사람 떠나 버리고 찾으려 하지 않자 지하철 플랫폼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던건 아닐까? 아니면 계속되는 실업난에 취업을 포기하고 지하철 플랫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?

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. 자세한 건 곰고미가 잠을 깨면 물어봐야 할 것 같다. 다음번에 목욕을 하고 나온 깨끗해진 이 과묵한 녀석과의 인터뷰를 진행 해봐야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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